동화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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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화는 후한 말기 인물로, 원래 파군 강주 출신이며, 유장 휘하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검소한 생활과 법규 준수를 통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호족들의 반발로 파동속국 도위로 전임되었다. 이후 익주 태수로 승진하여 청렴함과 이민족과의 협력을 통해 지역을 다스렸다. 유비가 촉을 점령한 후에는 장군중랑장으로 임명되어 제갈량과 함께 유비의 일을 보좌했으며, 제갈량은 그를 칭찬하며 본받을 만한 인물로 여겼다. 동화는 청렴한 관리로 평가받았으며, 아들 동윤 또한 촉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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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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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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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동화 |
로마자 표기 | Dong He |
한자 | 董和 |
자 | 유재 (幼宰) |
출생지 | 지장, 후베이 |
사망일 | 221년 초 |
직업 | 관료 |
자녀 | 동윤 |
관직 정보 | |
관직 | 장군중랑장 (掌軍中郎將), 군사 담당 |
임기 시작 | 214년 |
임기 종료 | 221년 |
군주 | 헌제 / 유비 (219년부터) |
관직 (유장 휘하) | 익주태수 (益州太守) |
임기 시작 (유장 휘하) | 미상 |
임기 종료 (유장 휘하) | 214년 |
군주 (유장 휘하) | 헌제 |
관직 (유장 휘하) | 성도령 (成都令) |
임기 시작 (유장 휘하) | 미상 |
임기 종료 (유장 휘하) | 미상 |
군주 (유장 휘하) | 헌제 |
2. 생애
동화는 유장과 유비를 섬겼으며, 제갈량과 깊은 친분을 맺은 관리였다. 그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 존경받았다.
유장 밑에서 우비장, 강원장, 성도령 등을 역임하며 엄격한 법 집행과 검소한 생활 방식으로 백성들의 사치스러운 풍속을 바로잡았다. 파동속국도위로 전임될 뻔했으나 백성들의 간청으로 유임되었고, 이후 익주태수로 승진하여 남방 이민족과의 협력에도 힘썼다.[4] [5]
유비가 촉을 평정한 후에는 장군중랑장에 임명되어 제갈량과 함께 좌장군 대사마부의 일을 담당하며, 20여 년간 요직을 두루 거쳤다.[7] [8] 그는 죽을 때까지 검소함을 잃지 않아 집에 재산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9]
제갈량은 동화가 죽은 후에도 그를 추모하며 부하 관리들에게 그의 업무 방식을 본받도록 훈시했다. 특히, 제갈량은 동화가 직무를 담당한 7년 동안 불충분한 점이 있으면 10번씩 반복하여 상담하고 지적했다고 언급하며, 그의 신중함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10]
이회의 고모부인 찬습이 법을 어겨 이회도 연좌되어 면직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화는 찬습이 호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죄를 용서하고, 이회의 사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후에 동화는 이회를 주에 추천했다.[14]
아들 동윤은 비의와 함께 우수하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동화는 허정의 아들의 장례식에서의 일로 인해 동윤보다 비의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5]
2. 1. 초기 생애와 유장 섬김
동화의 선조는 본래 익주 파군 강주현(현재의 충칭시) 출신이라고 한다. 한나라 말기, 동화는 일족을 이끌고 익주로 이주했다.[2]유장은 동화를 우비현장, 강원현장, 성도 현령으로 임명했다.[2] 당시 촉 땅은 풍요로웠지만, 사치스러운 풍속이 만연하여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제후의 의복을 입고 호화로운 음식을 먹으며, 혼인과 장례에 가산을 탕진할 정도였다.[3]
동화는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고, 수수한 옷과 간소한 식사를 하며 신분을 넘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제를 만들었다. 그가 부임한 곳마다 풍속이 바뀌고 백성들은 법규를 두려워하여 범하지 않았다.[3]
그러나 현의 호족들은 동화의 엄격한 법을 싫어하여 유장에게 동화를 파동속국도위로 전임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러자 수천 명의 관리와 백성, 노약자들이 동화의 유임을 간절히 원하여 유장은 그를 2년간 더 유임하도록 했다.[4]
그 후, 동화는 익주태수로 승진했는데, 청렴함과 검소함은 여전했다. 동화는 남방의 이민족들과 협력하여 일하고, 성의로써 일관된 일에 매달렸으므로 남방 사람들은 그를 아끼고 신뢰했다.[5]
2. 2. 유비 섬김과 제갈량과의 관계
214년 유비가 촉을 평정한 후, 동화를 초빙하여 장군중랑장(掌軍中郎將)으로 임명하고, 군사장군 제갈량과 함께 좌장군 대사마(유비)의 일을 담당하도록 했다.[7][8] 이들은 채택할 수 있는 제안은 제시하고, 채택할 수 없는 제안은 반려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그 직책에서 제갈량과 동화는 같은 마음으로 협력했다.동화는 관직에 올라 봉록을 받은 이래 20여 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가족은 사적인 재산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9]
동화가 죽은 후,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여러 관료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정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임명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생각을 모으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충성스러운 이점을 수집하여 충성심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작은 불만으로 멀리하거나, 의견 불일치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면 큰 손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가 뒤집혀 단결이 확보되면, 부러진 받침대를 버리고 진주와 옥을 얻는 것과 같다. 오직 서서(원지)만이 신속하고 의심 없이 대처할 수 있었고, 또한 7년 동안 사무실을 관리했던 동화(유재)는 문제가 완료되지 않으면 열 번이나 검토하여 상호 이해에 도달했다. 만약 한 사람이 원지나 유재의 부지런한 인식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10분의 1이라도 모방할 수 있다면, 나는 실수를 덜 할 수 있을 것이다."[10]
제갈량은 또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나는 최주평과 교류하며 나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자주 들었다. 나중에는 서원지와 교류했고, 그의 가르침을 종종 받았다. 이전에 나는 동유재와 중요한 문제를 상의했고, 그는 매번 성실하고 진지하게 의견을 말했다. 그 후, 나는 호제(위도)와 함께 일을 처리했고, 자주 그의 훈계를 받았다. 비록 나의 기질과 본성이 소박하고 무지하여 항상 그들의 의견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이 네 명의 재능 있는 사람들과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였고, 또한 그들의 충성스러운 본성과 올바른 말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11]
제갈량은 항상 동화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간직했다.[12]
3. 평가
동화는 청렴하고 검소한 관리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촉나라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고, 사치를 금하며, 백성들을 위한 법규를 제정하여 풍속을 교화했다. 이러한 노력은 백성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으며, 특히 남방 이민족과의 관계 개선에도 크게 기여했다.[13]
제갈량은 동화를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에도 동화의 청렴함과 직언을 강조하며 부하들에게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제갈량은 동화가 직무를 담당하는 동안 불충분한 점이 있으면 10번씩 반복하여 상담하고 지적했다고 언급하며, 그의 충성심과 신중함을 칭찬했다.[13]
진수는 《삼국지》에서 동화를 "현명하고 존경할 만한 관리"라고 평가하며, 유파, 마량, 진진, 동윤과 함께 촉나라 최고의 관리 중 한 명으로 꼽았다.[13] 또한, 『시경』의 시를 인용하여 그의 검소한 행실을 칭송했다.
양희는 『계한보신찬』에서 동화를 "청렴하고 부동의 마음을 지니고 직언을 토하며, 영민들에게 칭송을 받았다"라고 칭찬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동화
유장의 부하로 처음 등장하며, 익주태수를 지냈다. 211년 촉이 유비의 공격을 받자 장로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진언했다. 유비가 성도에 다가올 때까지 항전을 주장했으나, 결국 유장이 항복하면서 동화 역시 유비를 섬기게 되었다. 유비 사후에는 제갈량을 보좌했다.
5. 가계
- 동윤 (아들)
참조
[1]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Publishing
[2]
문서
Sanguozhi vol. 39
[3]
문서
Sanguozhi vol. 39
[4]
문서
Sanguozhi vol. 39
[5]
문서
Sanguozhi vol. 39
[6]
문서
Huayang Guo Zhi vol. 4
[7]
문서
Zizhi Tongjian vol. 66
[8]
문서
Huayang Guo Zhi vol. 6
[9]
문서
Sanguozhi vol. 39
[10]
문서
Sanguozhi vol. 39
[11]
문서
Sanguozhi vol. 39
[12]
문서
Sanguozhi vol. 39
[13]
문서
Sanguozhi vol. 39
[14]
문서
『三国志』蜀志「李恢伝」
[15]
문서
『三国志』蜀志「費禕伝」
[16]
문서
동유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 중 동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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